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휴이 롱 (문단 편집) == 평가 == 미국 역사상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선명한 진보주의자로 꼽히는 롱의 모토는 '''"모든 사람이 [[왕]]"(Every Man a King)'''이었다. [[대공황]]의 불황 가운데 롱은 모든 사람이 왕 같은 대접을 받아야 한다면서 부의 재분배 정책을 주장했다. 물론 '''롱은 [[반공주의]]자였다.''' 롱의 주장은 [[사회주의|생산수단의 공유화]]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정부가 나서서 부자들과 대기업의 부를 국민들에게 분배한다는 정책이었다.[* 롱의 정책이 일반적인 [[복지]] 정책과 다른 것은, 단지 정부가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넘어서 부자들이 독점하는 '''부(자산) 그 자체'''를 국민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어찌보면 자본의 사적 소유를 적극 옹호하고 있었던 셈이다. 단지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상한선을 넘어 독점하는 것을 반대했을 뿐이다.] 오히려 이런 부의 재분배야말로 공산주의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지지자들은 '미국사상 주류 정계에 진출했던 최고의 거물급 [[진보주의]]자'라고 평가하지만, 비판하는 사람들은 '미국에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시키려고 했던 남자'라고 혹평한다. 또한 일부에선 [[포퓰리즘]]적 정책으로 재정건전성을 해친 측면은 있지만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자본주의를 긍정하고, 이념적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 내에서 정치 개혁과 복지 국가를 지향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자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롱 암살 후 정계와 학계에서 롱을 대부분 부정적으로 평하고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고 말한다. 일례로 [[미국 사회당(1901)|사회당]] 소속으로 여섯 번 대선에 나섰고 롱과 토론까지 해본 [[노먼 토머스]]는 롱을 '미국의 탈을 쓴 파시스트'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카이저라이히]] 같은 대중매체로 롱이란 인물이 대중들에게 알려지자 재평가가 나왔다. 미국인들이 [[버니 샌더스]] 돌풍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재임을 시작으로 포퓰리즘을 과거와는 다르게 바라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그의 통치 스타일을 주로 비판한다. 롱은 친인척을 주요 자리에 앉히고 정적에게 협박과 매수를 일삼는 등 굉장히 부패하고 권력을 중요시하는 권위주의적 인물로 독재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과도한 포퓰리즘 때문에 루이지애나의 부채는 크게 늘어났다. 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은 그의 정책을 펼치려면 협박과 매수는 불가피했음을 강조한다. 롱이 등장하기 전 1920년대 초반까지 [[루이지애나]]주의 정치는 부패하고 보수적인 기득권층과 엘리트층이 장악하였다. 롱은 그들에 맞서 흑인을 포함한 루이지애나 빈민층의 구제를 위해 싸웠다. 롱의 정책 중 정치권의 반발이 제일 심했던 것은 문맹률을 낮추기 위해 시행했던 무상 초등 교과서 제도와 문맹자들을 위한 야간 학교를 늘리는 일이었는데, 문맹률을 낮아져 빈민들의 선거 참여가 가능해지면 제도권 정치인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릴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즉, 롱의 반대파들은 롱의 정책들이 서민들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자신의 부를 늘리는 것에 방해가 될까봐 롱에 반대했지, 그의 통치방식이 비민주적이어서 반대하지 않았다. 롱이 시행한 정책들은 효과도 좋아서 문맹률은 크게 줄이고, 빈민층의 학교 입학 비율도 20%가량 늘렸다. 롱의 영향으로 다른 남부 주들과 달리, 롱 뒤에 취임한 루이지애나주의 주지사들은 정부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진보파들이었다.[* 다만 1940년대 후반 [[아칸소]]주에선 [[시드 맥매스]]라는 젊은 진보 정치인이 주지사로 당선돼 롱과 비슷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물론 휴이 롱 본인과 동생인 얼 롱 주지사 사후 그 영향력이 크게 줄어서 보수적인 주지사들도 자주 집권하기도 했다. 한편 뉴올리언스 시장을 역임한 쳅 모리슨이나 롱 가문을 이어 20세기 후반 루이지애나 공직을 다수 차지했던 랜드리우 가문같은 롱 계열이 아닌 루이지애나 진보 정치인들도 충분히 존재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롱의 주장만큼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누진세]], 사회보장제 등 그의 많은 주장들을 정권 후반부에 받아들였다. 롱이 만약 암살되지 않고 [[민주당(미국)|민주당]] 대선경선에 뛰어들었다면 어찌되었을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물론 루스벨트라는 산을 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롱이 암살된 데에는 다른 배후의 음모가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롱이 유력한 대선주자였기 때문에 암살당했다는 주장이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때문에 휴이 롱을 민주당 진보계파의 아버지로 보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휴이 롱의 인지도와 달리 민주당의 역사에서 롱은 철저한 [[아웃사이더]]였기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현대 민주당 좌익 계파의 실질적인 시초는 [[조지 맥거번]][* 그의 매우 급진적이었던 주장도 의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노조와 농민 조직에 의존했던 민주당의 특징을 벗어나 대도시의 여성, 흑인, 대학생, 성소수자를 중심으로 한 풀뿌리 선거운동이 민주당의 역사에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고 평가받는다.] 상원 의원으로 평가받기 때문에 인터넷에서의 인식과 실제 휴이 롱이 민주당의 역사에서 차이하는 지분이 상당히 차이가 있는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